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일본원정 (문단 편집) === 몽골의 원정 준비 === 이듬해인 [[1270년]]에 쿠빌라이는 고려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했다. 물론 목적은 일본 침공이었다. 이 [[둔전]] 정책은 고려 백성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듬해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글을 올려 가을까지 군량과 말먹이는 힘이 닿는 데까지 조달할 것이니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때 원종은 진도에 거점을 마련한 [[삼별초]]가 아직 진압되지 않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당시 [[삼별초]]는 진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일종의 해적 집단이 되어 해안을 따라 오가던 조운선을 약탈하고 육지를 공격해 배를 불사르고 몽골군을 죽이거나, 심지어 일본에 사신을 보내 협공을 제의하기도 했다. 막부 측이 삼별초가 보낸 국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지 만일 이해했다면 자칫 그간 왜구 침입과는 차원이 다른 재난이 일어났을 것이다.[* 고려 원종의 조정이 보낸 국서와 삼별초에서 보낸 국서에서의 몽골에 대한 태도가 판이하여, 같은 고려 국서인데 왜 이러냐고 무지 헷갈려했다. [[삼별초]] 문서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늦어지게 한 셈이다. 1271년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번 사신인 [[금나라]] 유민 출신 조양필[* 한족화된 [[여진족]] 출신의 관료다. 원에는 사람이 워낙 부족해 색목인이나 한족, 거란/여진족 관리가 많았다.]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대외 창구인 다자이후에 가서 [[교토]]의 천황과 직접 교섭을 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불과 18세에 불과한 [[호죠 토키무네]]였는데 토키무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서일본의 슈고[* 지방 군벌]와 지토[* 슈고보다 하위 계급]들에게 수비를 강화하라고 명했다. 결국 원나라는 말로는 도저히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각 고려에 병선 건조와 징병을 명했다. 그와 더불어 1272년에는 일본 원정에 방해가 되던 [[제주도]]의 [[삼별초]]를 토벌했다.[* [[제주도]]에 목장을 설치한 것도 일본 원정에 필요한 군마를 이곳에서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1273년에 마지막 초유사가 귀환했고 쿠빌라이는 [[삼별초]]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을 모아 일본 원정을 결의했다. 1274년 홍다구(洪茶丘)[* 그의 가문은 일찍이 조부 홍대순(洪大純) 시절에 몽골에 투항해 부역하였으며, 부친 홍복원(洪福源)도 [[여몽전쟁]] 시절에 몽골군 앞잡이로 활약해 매국노 짓을 했다. 거기에 홍다구는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서 벼슬을 했기에 고려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홍다구의 동생 홍군상(洪君祥)은 일본 정벌 당시 고려의 사정을 원 조정에 전달하여 그 부담을 경감시켜주게 해 고려에서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익성후로 봉하였다.]의 악랄한 독촉으로 불과 4개월만에 군함 900척이 건조됐다. 300척은 전선, 300척은 상륙을 위한 소형선, 300척은 물을 나르기 위한 급수선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부들이 겪은 참상은 끔찍했다. '''하루 종일 물 속에 있다보니 그들의 다리가 썩어 [[구더기]]가 들끓기도 했다'''. 지휘관은 [[원나라]] 측은 몽골인 [[훈둔|훈둔(忻都, 忽敦)]], 고려 출신 홍다구, 금나라 항장 유복형[* 별 능력은 없었으며 고려군을 우습게 보고 독자행동하다 화살 맞고 아프다며(...) 중국으로 돌아가서 다신 안 오는 찌질한 추태를 보였다. 2차 원정 때 합류한 남송 출신 한족 항장 범문호가 오히려 더 활약했다.]이었고 고려 측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원나라군이 2만 5천[* 원나라군에서 [[몽골인]]은 예나 지금이나 적은 인구 탓에 지휘관 몇 명을 제외하면 매우 적었고, 대부분은 이미 원나라에 항복한 [[한족]]이나 [[여진족]]/[[거란]] 출신들이 훨씬 많았다. 실제로 밑에서 서술할 일본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은 유복형도 [[산동성]] 출신의 금나라 항장인 [[여진족]]이었고 수군 사령관 범문호는 남송 항장 [[한족]]이었다.], 고려군은 전투병 8천에 뱃사공, 바닷길 안내자, 수부 6천 7백으로 총 1만 4천 7백이었다.[* 이때 격군이 전투 병력보다 배로 많았던 [[판옥선]]과 비교하여 뱃사공이 전체 규모의 절반도 안 되는데 어떻게 일본까지 간 건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판옥선은 연안 전투함이자 평저선이었다. 격군이 많았던 이유는 돛을 이용하기보다 전장 기동성을 위주로 운용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 원정용 함선이라면 원양 항해를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수부가 적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1274년 음력 10월 3일 여몽연합군은 [[고려]] [[경상도]]의 [[마산합포구|합포]]를 출발했다.'''[* 이때만 해도 일본과의 교역은 동래부(부산)보다는 합포(마산)이 주로 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